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틴 루터 (문단 편집) === 루터 사후의 종교개혁 === 황제 [[카를 5세]]는 그의 숙적들인 루터가 1546년에 사망하고, [[헨리 8세]]와 프랑스 [[프랑수아 1세]]가 차례로 사망하자 오스만과 화해하고, 그동안 미뤄둔 독일 내 [[개신교]] 탄압을 시작했다. 그동안 루터에 공감한 신교도 제후들은 늘어났고, 거주민들이 개신교로 개종한 지역도 많았다. 하지만 황제에 맞선 신교도 제후 동맹 세력은 여전히 듣보잡을 제외하면 작센 선제후 [[요한 프리드리히 1세]]와 헤센 방백 [[필리프(헤센)|필리프 1세]]가 거의 전부였고,[* 군소제후들과 제국도시들도 있었지만 군사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세력은 적었다. [[팔츠 선제후국|팔츠]] 선제후 [[프리드리히 2세(팔츠)|프리드리히 2세]]가 초반에 도움을 주긴 했으나 카를 5세에게 발리고 바로 이탈했다.] 황제는 우선 교황에게 1만 2천명 병력분의 무장자금도 지원받았고, [[스페인]]에서 4만 병력[* 이것은 황제 선거시 [[독일]] 내 분쟁시 타국 병력을 동원하지 않기로 한 자신의 공약을 위반한 것이었다.]과 자신의 고향 [[신성 로마 제국]] 내 [[합스부르크 네덜란드]]에서 1만 7천명을 동원하여 종교 일원화에 반대하는 신교도 제후와 도시 토벌에 나섰다. 신교도 제후들의 세력이라곤 헤센 방백 [[필리프(헤센)|필리프 1세]]가[* 필리프도 중간에 [[중혼]] 문제로 신교도 동맹을 탈퇴하고 황제에게 굴복해서 그닥 미더운 상대는 아니었다. [[이혼]]보다 중혼이 낫다며 중혼에 찬성해서 루터의 [[흑역사]]가 된다.] 대장을 맡아서 겨우 1만명 수준. 당연히 황제군은 파죽지세로 신교도 지역을 접수했고, 신교도지만 중립이었던 작센 선제후의 6촌 동생 작센-마이센의 [[모리츠(작센)|모리츠]][* [[베틴 가문]]의 종가는 에른스트 계열로 작센 선제후 집안이고 방계 알브레히트 계열은 [[드레스덴]], [[라이프치히]] 등을 분할 받았다.]는 황제의 동생인 독일왕이자 오스트리아 대공 [[페르디난트 1세]]와 동맹을 맺고 친척이자 가문의 종손인 [[요한 프리드리히 1세]]를 공격했다.[* 이 일로 신교도들은 모리츠를 '마이센의 유다'라고 불렀다.] 결국 작센 선제후는 영지 거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기 위해 GG를 치고 비텐베르크에서 항복했으며,[* 황제는 직접 항복을 받기 위해 제국 추방령을 유보하고 사형을 면제하는 아량(?)을 베풀었다.] 패전 소식을 전해들은 헤센의 필리프도 자진출두하여 네덜란드에 수감되었고, 독일 지역은 카를 5세의 뜻대로 종교 일원화가 되는 듯 보였다. 그러나 아직 저항 중이던 마그데부르크의 공략을 모리츠에게 맡기고 카를 5세는 [[인스브루크]]로 철수 했는데 모리츠가 한 번 더 배신을 때렸다.[* [[프랑스 국왕]] [[앙리 2세]]의 재정지원으로 나머지 신교도 제후들이 전력을 복구했다. 앙리 2세는 대가로 제국 내 [[프랑스어]]권 지역인 아라스와, [[메스(프랑스)|메츠]], [[툴(프랑스)|툴]], [[베르됭]] 교구를 영향권에 포섭했다.(제국의 지배권 하에서라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)] '''황제군을 이끌고 인스브루크를 공격한 것.''' 황제는 놀라서 [[이탈리아 반도]]로 도망쳤고, [[트리엔트 공의회]] 중이던 가톨릭교회 인사들도 나란히 줄행랑을 쳤다. 모리츠의 행동은 예상 밖이긴 하나 명분은 있었다. [[마그데부르크]]를 모리츠의 영지로 준다고 낚았다가 원래 다스리던 브란덴부르크 호엔촐레른 가문 방계에 돌려줬고, 헤센의 [[필리프(헤센)|필리프 1세]]는 그의 [[장인어른]]이었고, 항복하면 풀어준다고 황제가 약속했다가 나중에 씹었기 때문. 그리고 황제의 무리수도 한 몫을 했다. 애초에 모리츠는 차기 황제 독일왕 페르디난트 1세와 동맹을 맺었는데 황제는 --갑자기 노망이 들어-- [[독일어]]도 못하는 자기 아들 [[펠리페 2세]]에게 제위를 물려주려고 시도해서 '''동생과 가톨릭 제후들의 반발을 샀다.''' 동생과 가톨릭 제후들은 소 닭 보듯 황제의 줄행랑을 방관했고, 1552년 파사우 협약으로 페르디난트와 모리츠가 협상하면서 '영지 내에서의 루터회 신앙 인정'이라는 루터파 제후들의 숙원이 이뤄졌다. 1555년 [[아우크스부르크 화의]]는 재확인한 것으로, 공식적으로는 '''제국에서 공식적으론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이 공인되어 루터파 탄압은 금지되었고, 기존의 [[가톨릭교회]]와 공존이 허용되었다.''' 황제는 승인을 거부했지만 [[스페인]]으로 도망친 이상 뒤집을 여력은 없었고, 1556년 10월 자진 퇴위를 선언한다. 1558년 3월 선제후 회의에서 황제의 은퇴를 수용하고 동생 페르디난트 1세가 등극했다. [[페르디난트 1세]]는 동부 [[트란실바니아|에르데이]] 지역의 [[헝가리인]] 귀족들이 자신의 헝가리 왕위를 인정하지 않아서 그들이 주로 믿던 개신교회에 대해 강압적인 정책을 쓴 반면, 독일에서는 비교적 온건한 종교정책을 폈다.[* 비교적이라는 뜻은 다른 지역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지, 자신의 영지인 [[오스트리아 대공국]], [[보헤미아 왕국]]에서는 신교도들을 탄압했다. 신교도 '''제후들에게만''' 관대했다. 신교도로 개종한 뷔르템베르크 공작 울리히를 쫓아냈다가 헤센 방백 필리프와 싸워서 다시 빼앗기는 등, 신교도 제후랑 타협만 한 것도 아니다.] 문제는 페르디난트의 후계자 [[막시밀리안 2세]][* [[스페인]] 궁정에서 골수 [[가톨릭]] 교육을 받았고 사촌인 카를 5세의 딸과 결혼했다. 다만 스페인으로 건너가기 전, 어린 시절에는 루터의 영향을 받은 가정교사들의 교육을 받았다.]는 모리츠를 따라서 종군했는데, '''신교도 제후들이랑 친해져서 자기가 [[루터교회]]로 개종하려고 했다.''' 충공깽한 페르디난트는 상속권 박탈을 내세워 막시밀리안을 협박했고, 1562년 가톨릭 신앙을 유지한다는 맹세를 하고 2년 후 자리를 이어받았다. 막시밀리안은 이 때문에 루터파에 호의적이었고, 오스트리아 내에서도 신교도 귀족들을 박해하지 않고 권리를 보장했다. 죽기 전에 신교도로 다시 개종하려 할 정도. 이러한 영향으로 루터 사후 독일의 많은 지역이 개신교 지역으로 변했다. 16세기 후반 독일 인구의 90% 가량으로 추산하는데, 70%는 루터파, 20%는 [[칼뱅파]]와 재세례파, [[바이에른]]과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이 신교도가 뿌리를 내렸으나, 16세기 후반 남독일 지역에서 [[예수회]] 주도의 [[마녀사냥]]으로 남독일 지역에서 개신교는 극심한 타격을 받았고, 다음 세기 [[30년 전쟁]]으로 많은 지역이 다시 가톨릭화되며[* 물론 강제력이 따랐다.] 남부독일 대부분과 라인란트 지역, 체코는 다시 가톨릭 우세지역으로 선회한다. 오스트리아의 신교도는 [[요제프 2세]]가 관용칙령을 내리기 전까지 [[헝가리 왕국]]으로 추방당했고 이들은 [[도나우 강]] 주변 [[독일인]] 공동체를 형성했다. 바이에른 지역과 잘츠부르크 지역에서는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는데 잘츠부르크 대교구에선 [[카를 6세]] 시기에 1만 5천명이 집단이동할 정도. 어쨌든 독일의 종교 지역이 구분이 되고 종교전쟁을 거치면서 현재의 분포와 비슷한 분포가 되었다. 대신 1648년 [[베스트팔렌 조약]]에는 기존의 루터파는 물론이고 칼뱅파까지 공인되어 제국 내 [[종교의 자유]]가 허용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